프롤로그 : 여행자와 이방인
여행하며 지구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세상엔 참 살기 좋은 곳이 많다고 느끼게 된다. 공기도 좋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여유도 있고. 나는 서울에 태어나 나고 자란 사람이지만, 많은 면에서 서울보다 나아보이는 동네도 잔뜩 있다.
사람이 행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에 ‘외국에 다녀온 사람의 입 다물기’가 있다 보니, 가끔은 이런 장소에 관해 이야기하고 다닌다.
“노르웨이에 뵘로란 동네가 지내기 좋더라고요.”, “니카라과에 오메테페란 섬이 있는데 거긴 몇 달을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누군가 내게, “혹시나 나중에 살고 싶은 장소가 있으신가요?”하고 물으면 내 대답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확고해진다. “한국이요. 한국 살고 싶어요.”
유년 시절 기억의 배경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한평생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문화 속에서 무슨 음식을 먹고 살아왔는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 인생에 처음 입력된 기억들은 쉽게 거역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외국에선 늘 이방인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언젠가 중미 정글 속 고대 마야 유적들을 탐험하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것 참 신기하긴 한데, 실제로 이 곳에 나같은 사람이 잔뜩 모여 사는 모습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가 않는군. 내가 마야인의 후손도 아니고.’
이번에 내가 여행할 길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걸을 ‘왕가의 길’이다. 긴 세월 동안 천천히 쌓아져 온 왕가의 길은 한반도 왕실의 위엄과 화려한 문화, 번영과 위기의 순간들이 서려 있는 길이다.
그러니 이번 길은 우리나라의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길이자, 걷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느끼게 하는 길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왕가의 길을 시작하기 위해 인류 역사의 시작되기 이전, 선사시대로 되돌아가 보자.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무려 7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리를 지어 사냥하거나 채집하며 생활하던 구석기 시대의 일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 십만 년 후, 농경이 시작된 기원전 8,000년 전의 신석기 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자 마침내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곳곳에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강한 족장이 주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해 국가로 발전하는 단계에 진입하게 되는데, 한반도 왕가의 길을 시작하게 된 지점도 바로 이 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고인돌 집중 밀집 지역’이다. 세계 전체 고인돌의 절반에 가까운 4만 여 기가 한반도에 분포되어 있다. 강화도에서는 보존 상태가 좋고 형태가 다양한 고인돌을 만나볼 수 있다. 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인돌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탁자식’ 고인돌을 찾으러 강화도 부근리에 있는 지석묘를 찾았다.
강화도 고려산 북쪽 끝자락 넓은 언덕에 육중한 고인돌이 외롭게 서 있다.
고대 거석 기념물만큼 권력의 위엄과 상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덮개돌의 무게는 무려 50톤에 달한다. 대형 버스 약 세 대에 맞먹는 무게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돌을 바라봤다. 그 옛날 이 무거운 돌을 받침돌 위에 올려놓은 것도 신기하고, 수천 년 넘게 이 자세로 세워져 있는 것도 신기했다. 종종 유적이나 풍화, 침식된 자연을 볼 때면 억겁의 세월 앞에 모든 게 작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제 떠날까 하는데 유치원 꼬마들이 잔뜩 체험학습을 왔다. 선생님 따라 쫄래쫄래 언덕을 올라오더니, ‘우와아, 크다’ 하며 몇 바퀴 돌다가 다시 줄 맞춰서 내려갔다. 돌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 인생 삼십 몇 년도 이렇게나 긴데, 수천 년 전의 유적이라니.’ 아이들은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나 보다.
하긴 나도 그랬지. 여기서 오십 년쯤 더 살게 되면 멈춰있는 돌덩이를 보고 눈물까지 흘리게 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고인돌 유적지를 빠져나와 강화도를 벗어나기 전에, 방문해야 할 왕가의 길 명소가 하나 더 있다.
익히 알고 있듯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국가는 환웅과 웅녀의 아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이다. 마침 강화도에는 단군과 관련된 명소가 두 곳 있는데, 하나는 단군이 제사를 지내던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이고, 하나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이다.
이번에 방문 할 장소는 이 삼랑성 내부에 위치한 1600년 역사의 강화 전등사이다.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천년고찰이다.
밖에다 차를 대놓고 삼랑성 성벽을 지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등사로 향하는 길목에는 아름드리 큰 소나무가 가득했다. 다만 소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심지어는 시멘트가 발라져 있기까지 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 당시 무기의 대체 연료로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만든 상흔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전등사의 풍경이 산과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었다.
고구려 시기에 세워진 전등사는 고려시대부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던 사찰로서 중하게 여겨졌다. 원래의 이름은 ‘참된 종교를 추구하라’는 의미로 진종사였으나, 1281년 충렬왕의 왕비가 진종사에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이다.
전등사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억압하던(숭유억불) 조선에서도 왕실 사찰로서 비호를 받던 사찰이다. 전등사가 있는 삼랑성 안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전등사가 실록을 보호하는 수호 사찰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만큼 사찰 안에는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이 역사책처럼 남아있다. 하나하나 풍부한 이야기와 시대를 품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강화대교를 건너 서울로 돌아오는 길, 김포에 있는 장릉을 찾았다.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는 왕릉은 문화의 보고이자 풍수지리상 명당의 상징이다. 왕가의 길에서 놓칠 수 없는 여행지다.
김포 장릉은 산의 경사가 완만해 능이 자리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신비한 분위기의 숲길이 사람들을 반기고 있는데, 소나무가 많이 심겨 있다. 사시사철 변함없이 푸르고 기상이 좋은 소나무는 풍수 사상에서 명당 자리에 심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수목이기 때문이다.
숲길을 지나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하니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가 잠들어있다. 그러나 조선왕조 임금의 무덤이라 하기엔 어쩐지 소박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이 곳은 원래 왕릉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임금의 아버지 묘인 대원군 묘로 조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제14대 선조의 아들이자 제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은 추존 왕이다. 죽은 후에 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들인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고 난 후에 아버지를 왕으로 승격시켰다. 원종은 왕자인 정원군이었던 당시 세자로 있던 적이 없었기에 추존이 부적절하다는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여하간 조선왕조의 이야기를 떠올리다 보면 원체 흥미진진 이야기가 많아 끝내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하나하나 이야기를 찾다 보면 그 이후 왕, 그 이전 왕가의 이야기까지 찾아보게 된다. 그러나 나머지는 다음 여정에서 이어가도록 하자.
다시 숲길을 걸어 나온 나는 이제 조선 역사의 중심, 한양으로 향했다.
1392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옛 고조선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개경에서 조선을 건국했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초대 국왕인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운 지 채 한 달도 한 돼 천도를 결심한다.
여러 후보지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한양을 도읍지로 결정했다. 도읍지 설계의 총책임은 개국공신 정도전에게 맡긴다. 그리하여 3년 후 새로운 궁궐이 완공되었고,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하라’는 의미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경복궁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자주 지나치게 되지만 볼 때마다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다. 휘황찬란한 수많은 현대식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언제나 중심에서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정문인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에 입장하니, 중문인 흥례문 사이에서 수문장 교대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8월의 더운 날씨였지만 한국 사람들을 비롯해 수많은 외국인이 걸음을 멈추고 경건히 의식을 관람했다.
수문장 제도는 15세기 조선 전기에 정비되었는데, 지금의 의식은 당시 궁궐을 지키던 군인들의 복식과 무기, 각종 의장물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이어서 흥례문과 근정문을 지나 경복궁의 핵심 건물인 근정전으로 입장했다.
근정전 앞은 임금의 즉위식이나 세자 책봉식 같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의식과 행사들이 열리던 곳이다. 이 마당의 이름이 우리에게도 친숙한 ‘조정’이다. 그리고 ‘근정’이란 이름은 정도전이 붙였는데,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뜻이다.
또 흥미로운 점은 조정 바닥의 돌이 매끈하지 않고 상당히 울퉁불퉁하다는 점인데, 이는 임금이 위에서 조정을 내려다볼 때 너무 강한 햇빛이 비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 한다.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과의 조화가 아름답다. 그리고 근정전의 왕좌는 마치 어둑한 허공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근정전 내 넓은 바닥이 한결같이 거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의도한 것이다. 근정전이 구름 위의 하늘 궁전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정전을 오르는 돌계단에도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고, 돌계단 사방에는 각 방향의 하늘을 상징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별자리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근정전 서편으로 이동해 경회루 연못을 따라 걸어본다. 연못에 비치는 인왕산의 산세가 수려하다.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지금의 경복궁은 1867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불에 타 대부분 소실된 탓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들으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럼, 그사이 긴 시간 동안 경복궁은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하고.
사실 경복궁은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었던 궁궐이다. 전란이 끝난 이후 조선 정부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소모되는 경복궁 복원을 포기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경복궁은 2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표범들의 서식지로 전락한 것이다.
대신 1610년, 광해군은 경복궁이 아닌 다른 궁을 먼저 중건해 조선의 제1 궁궐, 법궁으로 선포한다. 그곳이 이번 왕가의 길 마지막 여정이다.
경복궁에서 안국역을 지나 창덕궁으로 걸어갔다. 불과 이 십여 분 만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에 닿았다.
창덕궁은 태종의 주도로 1405년에 완공되었다. 한양에 이미 경복궁이 있는데 굳이 십여 년 만에 이렇게 가까이 새로운 궁을 지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경복궁은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 데다(1차 왕자의 난), 자신의 정적인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궁이기 때문에 태종에게는 꺼림칙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태종은 왕위에 즉위한 직후 조선의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 하는 와중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창덕궁과 경복궁의 가장 큰 차이는 궁궐의 형태에 있다. 경복궁이 기하학적인 대칭을 중시하며 왕가의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낸 것과는 달리, 창덕궁은 주변 환경에 맞추어 얽매임 없이 지어졌다. 전형적인 격식에서 벗어나 자연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게 건설된 것이다.
때문에 창덕궁을 처음 방문한 사람이라면 색다른 궁궐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게 될 수도 있다. 건물들은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흩어져 배치되어 있으며, 심지어 궁궐의 중심이 되는 정전인 인정전은 정문과 완전히 틀어져 있다.
재밌는 점은 창덕궁의 이러한 특징이 정작 건설을 명령했던 태종은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는 것이다.
창덕궁의 공사 책임은 당시 판한성부사(지금의 서울시장 격)였던 박자청이 맡았다. 그런데 심지어 태종은 박자청을 하옥시키기도 했다. 인정문 밖 마당의 구역을 똑바로 직사각형으로 만들라 명령 했는데, 박자청이 산세를 살리고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고집을 부려 사다리꼴로 만든 탓이었다.
결국 가장 한국적인 미를 보여준다 찬사를 받는 지금의 창덕궁은 박자청이라는 인물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의도된 설계였다.
나는 창덕궁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해둔 덕에 후원 관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창덕궁 후원은 한국인의 자연관과 사상, 정서를 보여주는 대표적 정원이기 때문에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이곳은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할 당시 조성되었고 세조, 성종 대에 확장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이 소실되면서 광해군 대에 다시 조성된 곳이다.
사실 창덕궁 후원은 오랜 시간 ‘왕가의 비밀스러운 정원’이란 의미로 ‘비원(秘苑)’으로 불려 왔다. 그러나 지금은 울창한 숲과 연못을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편히 걸을 수 있으니, 비원이라는 말은 더 이상 맞지 않는 것 같다. 한 편으론 이 모든 과거의 풍경들이 더 이상 비밀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어찌나 다행으로 느껴지던 지.
골짜기마다 자연의 지세에 따라 잘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정자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왕가에서는 이곳을 휴식과 산책을 비롯한 여러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후원은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이 있어 학문을 탐구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고, 자연 풍광을 느끼며 시를 짓고 꽃구경 하며 치유를 받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천천히 드넓은 후원을 누볐다.
왕가의 길 에필로그
나도 이제 제법 머리가 굵어서 그런가? 한반도의 고조선과 삼국시대의 역사가, 조선 왕조의 역사가 흥미로운 소설만큼이나 재밌다. 왕실의 유적과 유물에 남아있는 풍부한 이야기 하나하나에 쉽게 몰입해서 빠져들게 된다.
왕가의 길의 매력은 바로 이런 점에 있다. 한반도 역사의 중심지이자 조선 왕조 오백 년 역사의 수도였던 수도권 일대는, 무척이나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세세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가의 길에서 만나는 문화유산들은 저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더욱이 이야기 하나하나가 거미줄처럼 또 다른 이야기들과 연결되어 있으니, 한 번 빠져들면 ‘한 편만 더, 한 편만 더’해가며 시리즈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멈추기 어렵다.
결국에는 나도 뼛속까지 한국 사람인가 보다. 점점 더 많은 나라를 여행할 수록, 다양한 문화를 경험해 볼 수록 되려 한국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세상에 어떤 강을 여행해도 한강만큼 내게 특별함을 느끼게 하는 강은 없었으니까. 어쩌면 내가 이렇게 떠나며 살 수 있는 이유는, 결국에는 돌아 올 정겨운 장소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번 길을 걸으면서 다시금 느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장소가 공감할 수 있는 과거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중한 일이다. 그것이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들 사이에 사는 지 잊지 않게 해준다.
왕가의 길에 추천할 음식은 서울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이라 할 수 있는 설렁탕이다.
설렁탕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조선 시대 임금이 농사가 잘되길 기원하며 직접 제사를 지내던 선농단 제단과 관련이 있다. 왕이 제사 의식을 진행하고 행사가 끝나면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소고기 국물을 나눠줘 거기에 밥을 말아 먹었던 것이 시초라는 이야기다.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유래설이 있다. 하지만 설렁탕이 한때 조선의 외식 문화를 제패했던 패왕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지금은 그 수가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종로와 청계천 주변엔 역사 깊은 설렁탕집이 여럿 남아있다.
진하고 뽀얀 국물에 향긋함을 더하는 파와 얇게 썰린 소고기 한 점. 한국전쟁 이후 미국 원조가 시작되며 더해진 얇은 밀가루 국수. 여기에 갓 지은 따듯한 흰 쌀밥과 아삭시큼한 깍두기까지.
그 아름다운 맛의 조화는 한국 사람 누구나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앉자마자 곧바로 내오는 패스트푸드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으니, 간편히 한 그릇 때우기 위한 바쁜 현대인에게도 부담이 없다.
나는 설렁탕을 먹을 때, 소금으로 간을 하고 밥을 말기 전 늘 국물부터 한 수저 맛본다. 슴슴하지만 감칠맛 가득한 맛이 중독성 있다. ‘아, 그래 설렁탕은 이 맛에 먹지’ 하며 생각하는 찰나, 머릿속 한편에선 비통한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김첨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설렁탕은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을 수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한 맛이다. 설렁탕을 먹을 땐 늘 그런 생각을 한다.